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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유튜브는 책을 삼킬 것인가

작성일 20-09-22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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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뉴욕타임즈》가 발행한 특집 기사 제목이 ‘탈텍스트 미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the Powr-text Future)’였다. 이 기사는 문자매체가 조만간 사라질 일은 없겠지만, 적어도 온라인에서만큼은 영상매체에 주도적인 자리를 내줄 것이라고 예측한다.

실제 우리나라도 책이나 백과사전, 심지어 검색엔진도 아닌 유튜브가 지식의 제일 원천이 되고 있다.

지금은 젊은이들뿐 아니라 초등학생부터 나이 든 사람들도 유튜브에 많이 접속하고 있다. 특히 코로나19로 인해 언택트 시대가 되다보니, 유튜브 사용은 필수가 되었다.

교회에서 실시간 예배도 유트브를 통해서 대부분 드리고 있다. 이런 시대적인 환경을 보면서 유튜브가 대세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라는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는 이런 질문에서 시작된 책이다. 책 제목만 보면 유튜브와 책을 비교에서 두 매체의 장점과 단점을 설명을 잘 해줄 것 같은 기대가 든다. 앞으로 어떤 매체가 대세를 이룰 것인가에 대한 예측을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책에는 실제로 이런 내용은 빈약하다. 오히려 이 책은 부제로 쓴 “삶을 위한 말귀, 문해력, 리터러시”가 책의 내용을 잘 정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문화연구를 하는 입장에서 삶이 말에 스며드는 방식에 천착해온 엄기호가 먼저 응용언어학과 교육학에 기반하여 말이 삶을 빚어내는 모습을 탐색해 온 김성우에게 손을 내밀므로 만들어진 책이다. 이 책은 두 사람의 대화 형식으로 전개하고 있다.

언어와 페다고지(교육학), 누구도 억눌리지 않고 삶의 주체로 서는 방법을 고민해 온 두 사람이 리터러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든 이유에 한 목소리를 내진 않았지만, 리터러시가 삶에 복무해야 한다는 것, 각자도생의 능력이 아니라 공동체 역량으로서의 리터러시가 필요하다는 것, 지금이 바로 리터러시의 변동과 그 영향에 대해 숙고할 적기라는 점에 의견을 같이 했다.

그 과정에서 서로가 ‘삶을 위한 리터러시’가 주는 기쁨과 가능성을 몸소 경험했다. 오랜 공부와 대화는 새로운 읽기와 쓰기에 대한 고민의 흔적으로, 함께 성장한 기록으로 오롯이 남았다.

멀티미디어와 문자, 공존할 수 있는 길
미디어 증가로 오히려 소통 단절 현상
극복 위해 어떻게 대화 시작할지 생각
 

 

‘리터러시(literacy)’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이 책에서는 ‘리터러시’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리터러시는 ‘문식성, 문해력, 리터러시’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어 사용되고 있다. 개별 학문 분과나 전문 분야별로 선호하는 용어가 다르기에, 이들을 칼로 무 베듯 구분하여 사용하는 것은 사실상 힘들다.

본 대담에서는 전통적인 문자 기반 정보 이해 및 활용, 소통 능력을 가리킬 경우 ‘문해력’, 문자뿐 아니라 이미지, 영상 등의 매체 이해 및 활용 능력을 포괄할 경우에는 ‘리터러시’를 사용한다.”

이 책은 기존의 문해력 개념이 가진 한계와 문제점을 살피는 것에서 시작해, 영상이 글을 집어삼킬 것 같은 시대의 읽기와 쓰기는 어떤 길을 찾아가야 하는지, 미디어의 변화는 우리의 몸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에 대한 논의로 나간다.

소셜미디어에서의 소통 증가와 미디어 환경의 변화로 세대 간 소통 단절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는 지금, 우리는 어떻게 대화를 시작해야 하는지, 관계와 맥락을 품는 리터러시의 개념을 어떻게 세워나가야 할지 생각한다.

멀티미디어와 문자가 공존하며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다매체 시대의 리터러시 교육의 구체적인 방법론을 탐색한다.

무엇보다 리터러시를 경쟁의 도구가 아닌 공공의 인프라로,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닌 모두가 누리는 기쁨의 활동으로 만들어가기 위한 방안을 고민한다.

두 사람이 나눈 대화의 내용 중에 일부분을 한 번 살펴보자.

“책 읽기든 영상 보기든 둘 중 하나만 잘하면 된다거나 혹은 지금은 영상 시대니까 영상 만드는 것만 잘하면 된다고 말하는 건 무책임할 수 있습니다. 어떤 매체를 가르칠 것인가를 고민할 때 ‘요즘 뭐가 대세라더라’를 중심으로 생각해서는 안 돼요.

인간에게 어떤 사고의 도구를 줄 것인가에 대해서, 그 도구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그러한 변화가 개인과 사회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지 대중성만을 좇아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완벽한 이해는 당연히 불가능한데, 책을 읽었을 때와 사람을 만나서 표정을 보고 말투를 들었을 때, 영상을 봤을 때, 이해나 사유의 방식이 다 다른 거죠. 그 방식들을 골고루 균형 있게 성장시키기는 필요하다고 봅니다.

영상이 막 뜨고 있으니까 이제 영상 능력을 키워줘야 되고 책은 됐다, 이렇게 판단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죠, 도리어 저는 이렇게 말할 것 같아요.

‘여러분, 영상 잘 만들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돼요. 여태까지 인류가 쌓아온 지식의 대부분이 텍스트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걸 싹 무시하고 좋은 영상을 만든다는건 만용이예요. 그리고 글도 많이 써보는 게 좋아요. 글이 갖는 특징과는 다른 영상만의 특징을 구현해내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라도요.’”

“매체에 따라 우리 뇌의 활성화 패턴이 달라진다고 할 수 있어요. 패턴이 달라진다는 것은 우리 뇌가 달라진다는 것, 우리 몸의 습속이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글이든 동영상이든 당장 필요한 지식만 얻으면 된다는 생각은 인간의 몸과 매체가 맺는 관계의 차이를 간과하는 것이고, 매체의 강점과 한계, 매체가 우리 머릿속에 일으키는 변화, 매체의 사회적 영향 등을 무시하는 것이죠.”

“‘글 읽기와 쓰기는 무시하고 영상만 본다’면서 학생들을 비난할 게 아니라, 앞서서 리터러시를 경험했고 현재의 미디어 생태계를 주도해서 만들어낸 기성세대가 책임을 지고 텍스트와 영상 등 미디어의 가교를 만들어야 돼요. 그 과정에서 영상에 능한 세대로부터 적극적으로 배운다는 자세를 견재 해야 하고요.

텍스트와 영상이 평행우주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나름의 방법이라는 점을 깨닫게 하는 거죠. 이 두 모드를 엮었을 때 더 풍성한 의미가 만들어질 수 있는 것 또한 경험하게 하고요.

여러 미디어를 대립물로 생각하지 않고 각자의 색깔과 힘을 지닌 래퍼토리로 보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각자의 몸, 그리고 그 몸에 새겨진 무늬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고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글과 책이 어떤 시대에 어떤 세대의 사람들에게 몸이었고 그 몸에 새겨진 무늬였으며 몸의 변신 수단이었고 그 사람들의 말이었다면, 지금은 이미지와 유튜브가 몸이고 그 몸에 새겨진 무늬이자 말이며 변신 수단이 된 시대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그 몸에 새겨진 무늬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하며, 그 몸과 소통할 수 있어야 하겠죠.

그 변신 수단의 의미와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몸을 보호하는 법 또한 배우고 존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삶의 리터러시, 삶을 위한 리터러시란 ‘좋은 삶’을 위한 리터러시입니다. ‘옳음’이라는 이름으로 타자의 삶을 억압하는 리터러시가 아니에요.

‘좋은 삶’을 생각하도록 모두를 초대하는 것이 삶의 리터러시입니다. 리터러시는 모두를 해방하고 자유롭게 하며, 그 자유로운 사람들이 서로서로 다리를 놓으면서 그것이 바로 ‘좋은 삶’이라는 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합니다.”

리터러시, 바벨탑 아닌 남 잇는 다리
깔볼 수 있는 능력? 다리 놓는 능력
교회, 진리 되신 예수님 머리 삼은 곳
 

리터러시가 중요한 것은 사람은 홀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독립된 개체이면서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일원이기도 하다.

사회를 벗어나 홀로 살아갈 수 없기에, 내 주위에는 다양한 존재들이 함께 있기에 리터러시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리터러시는 나와 남을 잇는 다리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엄기호와 김성우는 리터러시를 바벨탑이 되어서는 안 되고, 다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종의 브리지, 다리를 놓는 것이 리터러시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민주주의 체제에, 또 다양한 담론이 쉼 없이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지금의 사회에 맞는 메타포라고 생각하는데요.

이 관점에서 보자면, 나한테 리터러시 자원이 많이 있다는 것은 타인을 깔 볼 자격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다리를 놓을 수 있는 능력이 많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죠. 다른 면에서 보자면, 다리를 놓아야 하는 책무가 생기는 것입니다.”

예전에 교회는 세상을 리더해 나갔다. 선한 영향력을 끼쳤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반대가 된 듯하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급변한 시대와 미디어 환경에 대한 리터러시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교회는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은 공동체이다. 진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미래나 영원히 변함없는 분이시다. 이 본질은 변함없어야 한다.

하지만 진리를 전하는 통로는 시대마다 변화 되어야 한다. 곧 비본질적은 것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교회는 변화하는 시대에 세상 가운데 진리를 전하는 다리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하지만 변화하는 시대를 리터러시하지 못하면 다리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다.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을 리터러시하지 못하면 교회 안에서 바벨탑만 쌓아갈 수밖에 없다.

코로나19로 인해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된 언택트 시대, 교회는 세상을 리터러시해서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세상을 연결해주는 다리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희망도 습관이다’

출처: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https://cafe.naver.com/judam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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