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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은퇴 후 남은 인생, 선교사로 주님께 드리세요”

작성일 20-03-05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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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년생. 해군사관학교를 나와 서울대에서 조선공학을 전공하고 평생을 해군 장교로, 조선공학 교수로, 대학총장으로 학교를 일으키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은퇴 후 60이 넘은 나이에 필리핀에 선교사로 헌신한 후에도 현지 아이들을 가르치고, 교회를 세웠다. 최근에는 필리핀에서의 10년을 담아 <시니어 선교사 행전>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지나온 삶에 허락하신 모든 것은 선교의 자원이었으며, 선교는 오직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었고, 자신은 하나님의 손에 들린 붓에 불과했다고 고백하는 김재복 선교사를 만났다. 


– 늦은 나이에 어떻게 선교사로 나가게 되셨나요? 

“은퇴를 앞두고 지나온 삶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남은 인생에서 갚고 싶었어요. 저는 전통적인 유교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모태신앙인 아내를 만나 결혼하면서 불신 사위를 맞을 수 없다는 장모님 말씀에 교회에 나가게 됐죠. 건성으로 1년 반쯤 나가다가 독일 군 연구소로 혼자 유학을 가게 됐어요. 독일에서 어느 날 담임 목사님이 주신 성경을 읽다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롬 5:8)는 말씀에 마음이 찡했어요. 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 8:35)라는 말씀도요. 하나님 사랑이 그렇게 큰가? 싶었죠. 한국에 돌아와서 해군사관학교 교수로 부임했을 때, 담임 목사님이 일반사회에서도 교수인데 교회 청년부 교사를 했으면 좋겠다고 하시며 교재를 주셨어요. 모르는 말이 너무 많았어요. 그 6개월이 아마 가장 성경을 많이 본 시기일 거예요. 그 후 군 교회에 출석했는데, 사관생도들에게 복음을 확실히 심어줘야 하는데 군목은 여러 교단에서 올 뿐 아니라, 1년 반, 2년이면 바뀌는 게 아쉬웠죠. 그에 비해 저는 지속적으로 출석을 하니까 교회 사정이나 행사들을 잘 알았기 때문에 수석 장로 역할을 했어요. 대령이 되었을 때 목사님이 저에게 장로직을 주셨어요. 그때가 47세였어요.” 


성경의 하나님 사랑에 충격

– 비교적 이른 나이에 장로가 되셨네요.

“그렇죠. 해군사관학교 교무처장을 거쳐 150명 정도의 교수를 총괄하고 생도들을 책임지는 교수부장에 대령까지 됐어요. 그런데 대령이 되고 1년이 채 안되었을 때 별까지 달아 제독(육·공군의 장군)이 되었죠. 군 조직은 철저히 계급사회이고 피라미드 구조여서, 모두 다 소령, 중령, 대령이 되는 것도 아니고 일부만 진급을 해요. 그런데 저는 순적하게 인도하시고 독일과 미국 유학까지 보내주시고 박사까지 받게 하셨어요. 하나님 은혜가 아니면 어떤 말로도 설명이 되지 않았어요. 게다가 군인은 어느 때가 되면 군복을 벗고 민간인이 되는데 재취업이 어려워요. 그런데 아직 만 49세에 전역을 하기도 전에 남해에 설립하는 도립대학에 공채 지원을 해서 총장이 되어 연임까지 했으니, 이것도 큰 은혜였어요. 그때 아내에게 말했죠. “여보. 다른 사람은 별도 달기 힘든데 우린 너무 많은 축복을 받았으니 이제는 세상의 감투가 아니라 하나님 일을 해야 하지 않겠나?”하고 말이죠. 아내와 저는 성향이 많이 달랐는데, 이 부분은 딱 뜻이 맞았어요.(웃음)”

– 이후에도 마산에 있는 대학에 계셨다고 책에서 봤어요.

“남해대학 총장으로 7년 반쯤 되었을 때 마산에 있는 창신대학 총장님이 “이제 어쩔 거야?” 라고 물으셨어요. “쉬어야죠.” 했더니, “60도 안됐는데 쉬다니? 우리 학교에 오라.”고 하셨어요. 기독교 학교여서 마음의 결정을 하고, 부총장으로 부임했어요. 여름방학에 교목이 청년부와 단기선교를 다녀오겠다고 해요. 허락을 했죠. 그런데 겨울방학에도, 또 다음 여름방학에도 간다는 거예요. 저는 그때 단기선교가 뭔지도 몰랐어요. 왜 계속 가냐고 야단을 치면서, 어디로 가냐고 물으니 필리핀이라고 했어요. 그 열 몇 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먹고 자는 것을 누가 해줍니까? 했더니 현지 선교사님이 하신다는 거예요. 학교에서 학생들을 보내면서 그렇게 신세를 지게 하다니, 반드시 다음에 한국에 나오시면 무조건 채플 강사님으로 모시라고 했어요. 얼마 후 선교사님이 오셨고, 채플이 끝난 후 “한국에 교회도 많은데 왜 하필 선교를 나갑니까? 현지에서 무슨 일을 하십니까?”라고 물었더니, “그렇게 궁금하시면 와 보세요.”라고 하시더군요. 그 순간 가슴에 쿵! 하고 뭔가 느껴지는 게 있었어요.”

“궁금하면 선교지에 와 보세요”

– 주님의 사인이네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나요?

“집에 가서 아내에게 말하니까. “여보! 바로 그거에요. 우리가 기도하고 있었던 거요.”라고 했어요. 그래! 그게 이거구나! 둘이 가장 마음이 맞은 날이었죠. 아직 임기가 2년이나 남았지만 다음 날 학교에 사표를 냈어요. 그런데 ̒학기중이니 학기를 마치고 가라, 학기말이 되니 학년을 마치고 가라.̓면서 차일피일 미뤄졌어요. ̒이러다가는 못 가겠구나, 결단 안하면 안 되겠구나.̓라는 마음이 들어 후임자도 없었지만 학교를 나와 필리핀으로 정탐을 떠났어요.”

– 직접 둘러보니 어떠셨나요?

“선교사님을 따라 농촌, 산골, 성경공부 하는 곳, 신학교 하는 곳을 보니 언어와 컴퓨터의 필요성을 절감했어요. 무엇이든 선교사님을 돕는 일을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제일 힘든 게 뭡니까. 내가 도와드리겠습니다.”라고 했더니 선교사님이 주일 아침 일찍부터 세 지역에 가시는데, 산길을 돌다 오면 마지막에는 파김치가 된다고 하셨어요. 그럼 저는 운전을 해드리겠다고 했죠. 하지만 선교사님은 필리핀에서 제일 귀한 일이 사람을 키우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저에게 교육자의 경험을 살려보라고 했어요. 생각해보니 저는 가르치는 것을 가장 잘 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소개받은 학교에 가보니 학생들은 원하는데 할 수 없는 수업이 바로 한국어였어요. 한국에서 정식 교수를 한 사람이, 그것도 원어민이 한국어를 가르친다고 하니 다들 대환영이었죠.”

– 어떻게 수업을 시작하셨나요?

“정탐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와서 외국인에 대한 한국어교사 자격증 이수를 했어요. 그때가 필리핀에 한류바람이 불고 있을 때여서 다들 한국어에 대한 관심이 많았죠. 파송받아 현장에 가보니, 저에 대한 기대가 컸어요. 군인 출신으로 교수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기저기서 특강을 해달라, 정규 담당교사를 해달라 부탁이 왔죠. 선교사가 부탁하면 제 스케줄을 어떻게 조정해서라도 무조건 갔어요. 그 지역 선교사들이 가르치는 학교는 다 가본 것 같아요.”

– 책에는 주일학교 이야기도 있던데요.

“필리핀에 간 지 3일 째 되던 날, 어딘지도 모르고 선교사님 차에 실려 농촌마을을 가게 됐어요. 어린아이들이 거리에 한 가득 있었어요. 한 집에 보통 아이들이 네다섯 명 있다고 했어요. 우리나라 60~70년대 분위기였죠. 이 교회는 주일학교가 없냐고 물었더니, “예배시간도 조정해야 하고, 집기들도 필요해서 주일학교가 없는데, 장로님이 하시겠습니까?” 하더군요. 청년들이 있으면 좀 붙여 달라고 했더니 7~8명이 왔어요. 한국어를 가르쳐 주겠다고 하니 다들 좋아했어요. 필리핀 청년들은 한국에 취업하려고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데 비싸거든요. 그렇게 한국어를 가르치다가 얘기했죠. “한국 가서 돈 버는 것도 좋지만,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이 정말 복이다. 내가 주일학교를 하고 싶은데 너희들이 교사를 하면서 나를 도와줄래?” 그랬더니 다들 좋다는 거예요. 시내에 가보니 의외로 주일학교 교재도 아주 많았어요. 학용품과 사탕을 나눠주니 아이들이 오픈예배에 100명씩 몰려왔어요. 주일에는 40명이 왔고요. 다들 기뻐했죠. 그 교회가 삐아스교회에요.”

– 그냥 순종하니 교회가 생기는군요.

“또 다른 교회 이야기도 있어요. 처음 필리핀에 갔을 때 잠시 골프를 쳤어요. 그때 교회 다니는 캐디를 만났는데, 화산 난민촌에 있는 자신의 교회를 좀 도와달라는 거예요. 필리핀에 큰 화산 폭발이 있었는데 그때 난민이 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었어요. 아이들이 예배시간에 떠들지 못하게 하는 게 자기 일인데, 아이들에게 줄 그림 그릴 종이와 크레용이 없다는 거예요. 그 얘길 듣는데 너무 도와주고 싶었어요. 얼마 후 예고도 없이 찾아가 봤어요. 난민들이 비좁게 모여 사는 수용소 마을에 겨우 집 한 칸을 교회로 쓰고 있었어요. 그런 처지니 주일학교는 엄두도 낼 수 없는 분위기였죠. 그곳은 처음 갔던 마을보다 아이들이 더 많았어요. 삐아스교회에서 30분 정도 거리여서, 그 교회 청년들에게 다시 부탁을 했어요. 청년들은 교회학교가 시작된 지 1년 만에 우리가 교사를 하게 됐다고 뿌듯해했어요. 그렇게 생긴 교회가 로스(ROS)교회에요. 삐아스교회 예배가 끝나면 아내가 싸 준 샌드위치를 나눠 먹으면서 로스교회에 갔어요. 그곳에도 청년 2명이 있었는데 삐아스교회 청년들을 잘 보고 배우라고 했어요. 양쪽 교회 청년들 모두 더 빨리 배우고, 믿음이 자라갔어요. 로스교회의 첫 성탄절은 처음으로 성탄 발표회도 하고 다들 너무 기뻐했어요. 얼마 후 교회가 비좁아서 더 이상 예배를 볼 수 없어서 넓히고 더 넓혔어요. 이런 일을 보니까 사역이 너무 기쁘고 힘든 줄을 몰랐죠.”

– 그런데 어떻게 한국으로 다시 오게 되셨나요?

“선교사들 따갈로그어 현지 스터디그룹과 현지 학교를 맡아 교장으로 섬기고 있던 때였는데, 2018년 12월에 목회자에게 현지 사역을 다 넘기고 들어왔어요. 처음 필리핀에 갈 때는 뼈를 묻으려 했으니 오기 싫었죠. 건강도 문제없고, 할 일도 많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너무 많았어요. 그런데 한국교회의 담임 목사님 권유로 여러 가지 교회의 필요도 있어서 돌아오게 됐어요. 그런데 와서 보니 더 중요한 것이 시니어 선교를 일으키는 것이었어요.”

“한국에서 하던 일을 선교지에서 하면 돼요”

– 시니어 선교에 대해 좀 더 들려주세요.

“지금 우리나라 젊은 세대의 선교사 헌신율은 떨어지고, 시니어들은 늘어나고 있어요. 그러면 손 놓고 젊은 사람만 기다릴 것인가? 아니죠. 우리나라 평균 55~6세가 정년이에요. 아직 일할 나이인데 재취업은 쉽지 않죠. 자영업을 해도 성공이 쉽지 않죠. 갈수록 위생과 영양은 좋아져서 이제는 100세 시대인데, 50세 후반에 은퇴하고 남은 3~40년을 어떻게 사느냐 이거죠. 보통 사람들은 건강관리하고 친구 만나고 여행하고 살겠지만, 크리스천은 주님이 그때까지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싶은 거룩한 부담이 다 있어요. 그럼 무엇을 할 것인가? 선교에요. 선교가 가장 좋은 답이에요. 대부분 선교지는 한국보다 생활비가 적게 들어요. 한국의 80% 정도면 생활할 수 있지요. 그러면 한국에 비해 남는 액수만큼만 사역한다는 생각을 하면 돼요. 하지만 제가 나가보니 주님은 내가 생각한 만큼만 하라고 하는 분이 아니었어요. 가족들이 주는 작은 용돈. 선교지를 위해 내어놓는 성도들의 작은 헌금. 그런 재정을 현지 학생 몇 명의 장학금으로 써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는 아이들이 있어요. 선교사들에게 도움을 받은 것처럼 너도 나중에 돕는 사람이 되라고 하며 지원해요. 그렇게 하면 시니어가 못할 일이 없어요. 선교지에 가서 또 뭘 하나? 은퇴할 때까지 했던 일을 선교지에서 하면 돼요. 한국에서 했던 일은 선교지에도 다 필요하죠. 두려워할 것이 없어요. 선교사 한 명이 열심히 하는 것보다 열 명의 선교사를 가르쳐 보내는 선교사 동원훈련. 아, 그게 맞구나 싶은 마음에 한국에 오길 결정했어요. 책도 그런 의미에서 썼어요.”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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