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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철학자 카를 포퍼(Karl Raimund Popper, 1902~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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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일 : 2019-12-23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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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카를 포퍼(Karl Raimund Popper, 1902~1994)는 1902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1994년 영국 런던 근교의 시골 마을에서 세상을 마친다. 온전히 20세기를 보고 살다 간 것이다. 그는 당대 유럽의 과학발전을 모두 보았는데 특히 자본가들의 탐욕과 정치가들의 독선이 빚어낸 전쟁으로 얼룩진 20세기 전체를 바라보았다.


철학자의 임무가 지식인의 큰 눈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진단하여 바람직한 대안과 세계관을 제시하는 것이라면, 포퍼는 그런 일을 학문적으로나 지성적으로 회피하지 않고 한 지식인이었다. 당대의 발전과 과학의 진보가 특별한 도시와 사람들에게 더 좋은 것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포퍼의 삶은 고난과 역경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출생과 교육

포퍼가 태어난 1902년에 빈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였다. 아버지는 개종한 유태계 법률가로, 빈 사회에서 상당한 지위에 있던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학구적이어서 그리스 · 로마 고전을 독일어로 옮기는 것이 취미였다. 자선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단다.


포퍼는 부엌을 빼고는 어디든 책이 꽂혀 있는 집안(무려 만 권이 넘는 장서가 있었다!)에서 아버지의 장서들을 탐독하며 안락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포퍼는 그보다 50년 전에만 태어났어도 유복하고 편안하게 세상을 살다 갈 팔자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세상은 한순간에 바뀌었다. 물자가 부족해졌고, 다른 사상과 민족에 대해 관대했던 제국의 이념은 흐려졌다. 빈곤층이 늘어나면서 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유태인에 대한 증오도 커 갔다. 포퍼 집안은 이미 유태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상태였지만, 그들을 같은 제국 시민으로 보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유태인이란 사실이 저주 같던 시기, 유태계였던 포퍼는 ‘어떻게 해도 탈퇴할 수 없는 클럽에 가입한 것 같은 상황’이었다.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그가 마흔 살이 넘었을 때까지도 유태인에 대한 박해는 그의 삶을 줄곧 일그러뜨렸다.


성장과정

1918년, 제국이 패전하고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선포되자 포퍼 집안의 가세는 완전히 기울었다. 엄청난 인플레이션으로 아버지의 재산이 하루아침에 날아가 버린 거다. 포퍼는 고등학교 졸업 시험도 보지 못한 채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열여덟 살 때에는 아버지에게 짐이 되기 싫어서 군대 막사 같은 학생 기숙사로 거처를 옮겼다.

빈약한 체구에 체력도 약했지만 생계를 위해 막노동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타고난 학구열만은 버리지 못했다. 빈 대학의 청강생 자격으로 아인슈타인1)의 강연을 들은 것은 이 무렵이다. 당시 젊은 지식인들이 흔히 그랬듯, 포퍼도 마르크스주의에 큰 관심을 가졌다. 특히 그는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보여 준 명쾌한 자본주의 분석과 급진적 사회 개혁론에 깊이 빠져 들었다.


마르크스는 사회에 만연한 고통과 불평등의 근본 원인을 가진 자들이 못 가진 자들을 착취하는 탓으로 본다. 정부는 권력과 돈을 움켜쥔 소수, 즉 부르주아들이 다수의 인민들을 착취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렇다면 가난한 노동자와 농민들, 즉 프롤레타리아들이 힘을 합쳐 일어나 부르주아들을 폭력으로 쫓아내야 한다. 그래야만 모두가 평등하고 인간다운 세상이 이루어질 수 있다.


개인의 가치를 재 발견

하지만 포퍼는 시위 도중에 한 학생이 경찰 총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 고민 끝에 생각을 바꾸었다. 아무리 좋은 목표와 명분이라 해도 개인을 역사의 희생양으로 무가치하게 파멸시키는 이념이라면 올바를 수 없다고 결론 내린 것이다. 포퍼는 항상 전체보다는 개인을, 화려한 청사진에 기댄 혁명보다는 다수의 동의에 기초한 점진적인 개혁을 중요하게 여겼다. 젊은 시절, 정의로운 이념과 명분을 내세우는 전쟁과 혼란이 오히려 사람들을 불의와 고통 속으로 몰아넣을 수 있음을 스스로 체험한 결과였다.


불안한 시대 상황과 생계에 대한 걱정 속에서도 포퍼는 학업에 대한 뜻을 굽히지 않았다. 먹고살기 위해 목수 도제 수업을 받으면서도, 대학 입학 자격시험을 치르고 빈 대학에 정식으로 입학했다. 쇤베르크2)의 ‘개인 음악 연주 협회’에 가입하고, 작곡가 베베른과 친분을 쌓은 것은 이 무렵이다. 상류사회에서의 관습과 하층민으로서의 생계 걱정이 일상에서 교차하는 불안한 시기였다.


4년 뒤, 포퍼는 빈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듬해에는 중등학교 수학 및 물리학 교사 자격을 얻어 1930년에는 고등학교 교사로 자리를 잡았다. 그가 교단에 선 1930년의 세상은 온통 파국으로 치닫는 듯 보였다. 미국의 증권시장은 붕괴되었고, 독일의 실업자 수는 500만을 넘어섰다. 더욱더 심해지는 유태인에 대한 반감이 포퍼의 목줄을 죄어 왔다. 과학철학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고 평가받는 《탐구의 논리》는 바로 이 시기에 쓰였다.


포퍼의 학문 여정

1946년, 전쟁이 끝나자 포퍼는 영국 시민권을 얻고 런던 경제 대학의 교수로 초빙되어 유럽으로 돌아왔다. 그는 1969년 퇴임할 때까지 계속 이 대학의 교수로 있으면서, 《탐구의 논리》와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의 저자이자 당대 최고의 지성으로 존경받았다. 전쟁이 끝난 뒤 다시 소련 · 중국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라는 ‘닫힌 사회’가 등장하여 자본주의 국가들과 맞서게 되었다.


그러자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 그들에 대한 비판서로 널리 읽히기 시작했다. 포퍼의 명성은 점점 더 높아져 갔다. 이 왜소한 체구의 오스트리아 출신 망명자는 예순세 살에 영국 여왕에게서 기사 작위를 받았다. 많은 국가 원수들은 영국을 방문할 때면 으레 그를 만나고 싶어했고, 그를 자신의 나라로 초대하기를 원했다.

아흔 살이 넘는 생애와 ‘열린’의 어감 탓에 포퍼 하면 부드럽고 자상한 노인의 이미지를 떠올릴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그는 자기주장에 대한 반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불같은 성격이었단다. 어떤 학자가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은 ‘열린 사회의 적’에 의해 쓰여졌다’라고 비꼴 정도였다.


그는 논쟁을 위한 싸움닭 같았다. 수업 시간에 학생이 질문을 잘못했다가는 개망신을 당하기 일쑤였는데, 상대가 상당한 석학일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20세기 최고의 철학자로 꼽히는 비트겐슈타인이 그와 논쟁을 벌이던 중에 부지깽이를 휘두를 만큼 흥분했다는 이야기는 아주 유명하다. 비트겐슈타인도 한 성격 하는 사람이었지만 포퍼도 못지않았으니, 둘 사이의 싸움은 어찌 보면 당연한 듯도 싶다.

그러나 포퍼의 과격함은 학문의 장에서만 그랬다. 일상에서 포퍼는 늘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친구도 많았고 그가 학생들을 좋아했던 것만큼이나 학생들도 그를 사랑했단다. 연구를 위해 외딴 곳에 집을 얻어 아내와 은둔하며 지냈지만, 말년의 포퍼는 가족과 여행을 떠나고 손자와 함께 아이스크림을 즐기는 등 여느 행복한 노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영예로운 은퇴

1994년, 포퍼의 죽음이 보도되었을 때, ‘아직도 포퍼가 살아 있었어?’라며 의아해 했던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열린 사회와 그 적들》과 《탐구의 논리》는 이미 1950년대부터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이었기 때문이다. 20세기의 가장 대표적인 철학자로 꼽히는 포퍼의 명성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사그라지는 느낌이다. 그렇다 해서 포퍼의 설득력이 떨어진 것은 아니다.


열린 사회의 가장 대표적인 적이었던 전체주의와 마르크스주의는 그의 생전에 이미 몰락했으며, ‘반증 가능성’과 ‘점진적 사회공학’의 이념은 이제 우리에게는 상식에 속한다. 따라서 그의 철학에 대해서는 ‘쇠퇴한다’라는 표현보다 ‘임무를 다해 영예롭게 은퇴하고 있다’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듯싶다.


물론 포퍼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열린 사회에 대한 주장이 현실에 존재하는 닫힌 사회들에 오히려 도움만 주고 있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현실에서는 모든 일이 합리적 대화로만 해결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약자들이 강자의 권력과 기득권에 맞서 자기주장을 합리적으로 내세워 점진적으로 사회를 개선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포퍼가 자본가들의 옹호자로 평가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에게 교수직 추천장을 써 준 이들은 아인슈타인, 러셀, 무어, 카르납 등 당대 최고의 스타급 학자들이다. 연구물이라고는 저서 한 권 정도밖에 없던 젊은 고등학교 선생에게 거물급 학자들이 선뜻 추천서를 써 주었던 점을 보면, 포퍼의 잠재력이 얼마나 높이 평가받았는지 짐작할 만하다.


열린사회란

‘열린 사회’는 ‘닫힌 사회’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닫힌 사회에서, 사회의 도덕과 법률은 마치 자연법칙과 같이 절대적이어서 비판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닫힌 사회는, 역사란 법칙에 따라 어떤 목표를 향해 발전한다는 역사주의에 기초해 있다. 국가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만 역사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지를 알고 있다. 일상생활에 빠져 지내는 개인들은 그렇지 못하다. 오직 국가만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수 있기에, 국가는 개인들의 삶을 일일이 간섭하고 통제한다. 또한, 대화보다 힘의 우위에 의한 폭력과 제재가 효과적인 설득 수단이라 믿는다.


닫힌 사회와 달리 열린 사회에서는 도덕과 법률을 필요에 따라 언제든 변경되는 약속 같은 것으로 본다. 또한 열린 사회는 역사를 정해진 방향에 따라 발전해 가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역사는 사람들 사이의 수많은 토론과 시행착오를 통해 점차 개선될 수 있다. 경험 부족 탓에 많은 혼란과 실수가 일어날 터다. 그럼에도, 열린 사회 사람들은 토론을 통한 세세한 조정들을 통해 오류를 점차 제거하며 사회가 발전한다고 믿는다.

열린 사회는 개인들의 이성을 존중하고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회다. 그러나 개인의 주관은 타인이나 다른 것으로부터 검증받아야 하기에 다른 비판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전제가 되야 한다.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지만 대화와 토론 비판을 통하여 지식과 과학은 진보한다.


내가 확신하는 어떤 지식과 정보도 그것은 불안전하고 틀릴 수도 있다는 겸손과 타인에 대한 존중이나 배려가 없이 난 항상 옳다고 보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폭력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진리에 가까이 가기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대화와 비판을 존중해야 한다, 그런 사회가 바로 자유와 평등의 사회이고 열린사회다.

또한, 열린 사회는 닫힌 사회와 같이 이상과 계획에 따라 개인들을 억누르고 희생시키면서 사회 전체를 개선하려는 시도에 반대한다. 열린 사회는 ‘점진적 사회공학’을 추구한다. 개인들이 이성에 따라 스스로 판단하며, 사회의 지배적인 견해에 반대 의견을 낼 수 있는 자유가 있을 때 사회는 비로소 점진적으로 발전해 간다.


닫힌 사회란

파시즘, 마르크스주의 등 온갖 거창한 이론들이 장밋빛 이상에 심취해 인류를 파멸로 몰아넣고 있던 시대에, 포퍼의 주장은 분명 전체주의자들의 폭력에 맞서는 합리적인 이론이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든 독선적인 이념이나 체제에 대하여 반기를 든 것이다. 지금으로 보면 자신은 옳고 바르고 선하다는 사람들 특히 종교인들에게 주는 경종이 크다. 언제나 자신의 것을 가르치려고 하고 검증되지 않은 것들로 확신에 찬 무지한 인간들에게 주는 큰 메지지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한다. .


그러므로 우리가 플라톤으로부터 배워야 할 교훈은 그가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그것은 잊어서는 안 될 교훈이다. 플라톤의 사회학적 진단이 우수했을지라도, 그 자신의 발전은 그가 대항해서 싸우고자 했던 악보다도 그가 추천했던 치료법이 더 나쁘다는 것을 증명한다. 정치적 변화를 억제하는 것은 치료가 아니다. 그것은 행복을 가져올 수 없다. 우리는 결코 소위 닫힌사회의 순진함과 아름다움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천국에서의 꿈은 지상에서의 실현될 수 없다. 일단 우리의 이성에 의존하기 시작하고 우리의 비판력을 활용하기 시작한 이상, 개인적인 책임의 요구와 더불어 지식의 증진을 위해 조력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기 시작한 이상, 우리는 부족적 마술에 전적으로 복종하는 국가로 되돌아갈 수 없다. 지식의 열매를 먹은 자는 천국을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가 부족주의의 영웅적 시대로 돌아가려 하면 할수록, 우리는 종교재판에, 비밀경찰에, 낭만화된 깡패행위에로 가는 것이 더욱 확실해진다. 
이성과 진리를 억압하는 것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적인 모든 것을 가장 야만적이고 포악한 파괴로 끝내고 말 것이 확실하다. 

자연의 조화된 상태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만약 우리가 되돌아간다면, 우리는 길 전체를 다 가야만 한다. 우리는 금수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하기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그것은 우리가 정면으로 부딪쳐야 하는 문제이다. 우리가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기를 꿈꾼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해서 행복을 찾고자 한다면, 우리의 십자가를 지는 일, 인간다움과 이성과 책임의 십자가를 지는 일에 위축되어 버린다면, 용기를 잃어버리고 긴장에 찌들어버린다면,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은 단수한 결정을 분명하게 이해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강화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금수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으로 남고자 한다면, 오직 하나의 길, 열린사회로의 길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성을 사용하여 안전과 자유를 위해 계획하면서ㅡ이 계획은 우리가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해야만 한다ㅡ미지의 세계,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세계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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